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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림없는 대장부 무산스님

기사승인 2018.05.27  14:4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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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대표하는 선사로 또 수행자로 세간에서는 한 줄의 시로 세상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넨 시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무산 오현스님

1932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7살 어린 나이로 출가해 1959년 직지사에서 성준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8년 범어사에서 구족계를 수지한 무산 오현스님은 8대와 11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3교구본사 신흥사 주지 등을 역임하고 종단 원로의원으로 또 신흥사와 백담사, 조계종립 기본선원 조실로 후학양성에 매진했습니다.

종단의 큰 어른으로 후학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스님의 삶은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고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소탈함과 호쾌함 그 자체였습니다.

sync- 무산대종사/(2016. 2 .21 을미년 동안거해제 법문)

(우리 엄마가 나를 낳아 놓고 먹을 것도 없고 그래서 뒷 절 무당이 이 애를 절에 팔면 오래 살 거다. 그래서 나를 절에 팔았어. 내가 무당의 젖을 빨고 살다 보니까 그 무당도 죽고 나도 죽을 때가 지났어. 그와 같고 이와 같은 거야. 그런데 나이가 많으니까 나를 큰스님 이라고 하는데 내가 큰 스님은 아니야. 어릴 때는 게으름 피웠고 중년에는 서가식동가숙 했고 서쪽에 갔다가 동쪽에 갔다가 살았고 늙어서는 여러분 보는 바와 같은 거야. )

스님은 백담사로 출가해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진 만해 한용운 스님의 애민, 평화 사상을 기리기 위해 1998년 만해사상실천선양회를 설립하고 만해축전을 열어 지금까지도 만해스님의 사상을 후대에 전하고 있습니다.

1999년 불교평론을 창간하고 만해스님이 창간한 유심을 복간하는 한편 2003년 만해마을을 조성해 문인들의 창작공간으로 내놓을 정도로 문학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스님은 시조시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66년 시조문학으로 등단한 스님은 1995년 남명문학상 2007년 정지용문학상, 2008년 공초문학상 등 수많은 수상내역으로 그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스님의 <인천만 낙조>는 2016년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시절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려 세간의 화제가 됐고 <적멸을 위하여>를 비롯해 스님이 쓴 200여 시조에 담긴 존중과 평화의 가르침은 해외에서도 번역돼 인정받았습니다.

무산스님의 수행과 문학의 바탕에는 늘 중생을 향한 자비가 있었습니다.

노동운동가 전태일기념사업회에 매달 후원금을 보냈고 반값등록금 촉구 집회에 나간 대학생들의 벌금 1억 3천만 원을 익명으로 기부했을 뿐 아니라 지관스님 열반 후 어려워진 가산불교대사림 불사를 후원하고 200억 원이 투여된 만해마을을 동국대에 쾌척했으며 지역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분기마다 나눔을 이어왔습니다.

상이 없는 소탈함과 격 없고 거침없는 무애행으로 출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무산 오현스님

끝을 알 수 없는 스님의 수행에 대한 열정과 자비심은 스님이 생을 다한 지금도 출세간에 또 우리들 가슴에 남아 쉼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BTN뉴스 이은아입니다.

BTN불교TV btnnews@btn.co.kr

<저작권자 © BTN불교TV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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