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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기획보도 5〕통도사와 3.1운동

기사승인 2019.02.12  07: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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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3.1운동 기획보도 다섯 번째 시간, 오늘은 그동안 조명되지 않았던 통도사의 만세운동을 살펴봅니다. 통도사 독립운동은 만해스님의 전략으로 시작해 오택언 스님을 중심으로 대규모 운동으로 번졌는데요. 해인사와 표충사 만세운동도 이끌어내며 남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이동근 기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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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지난 1919년 3월1일 오후 2시, 서울에서 점화된 만세운동은 개성과 옥구, 제주 등으로 이어지며 전국으로 파급됩니다.

불교계는 만해스님과 중앙학림 학생들이 협심해 지방 만세운동을 계획했는데, 당시 만해스님은 3천 장의 독립선언서를 지역별 책임자에게 배포하며 소임을 맡깁니다.

이중 오택언스님은 양산 통도사 만세운동을 담당했고, 3월5일 사찰로 내려가 강원의 스님과 학생대표 등과 비밀리에 논의하며 같은 달 13일 거사를 행하게 된 것입니다.

한상길 /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본사에서 선발돼 올라온 분들이기 때문에 재적 본찰이 있고요, 그래서 3.1운동 당일 날 거사에 참석해서 시내 곳곳에 유입 물을 살포하고 검거령이 떨어지니까 다시 스님들이 재적사찰로 내려가게 된 겁니다.)

통도사 만세운동은 지역민들이 대거 참여한 군중집회이자 또 다른 사찰 독립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했습니다.

1919년 3월13일, 장날에 열리는 줄다리기 대회를 명목으로 신평 장터에 짚으로 만든 밧줄을 놓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통도사 보통학림과 불교 전수부 학생, 스님 등이 합세하며 독립만세를  외친 것입니다.

이후 사건을 접수한 헌병경찰이 급습했지만 군중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통도사 만세운동은 3월 31일 해인사, 4월 4일 표충사 만세운동을 일으킨 중요한 거점이 됐습니다. 

한상길 /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통도사 만세운동이 자체 지방사찰의 청년승가들이 민족운동에 대한 염원으로 지방주민과 합세해서 독립만세운동을 펼쳤고요, 그 지역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됩니다.)

통도사 만세운동의 주역은 80여명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이중 오택언스님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중앙학림 2학년생이었던 오택언스님은 사제지간으로 추정되는 만해스님의 부름으로 3.1운동 선두행렬에 섰고, 통도사 만세운동을 기획했지만 누군가의 밀고로 감옥에 갇히는 안타까움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8개월간의 수감생활 속에서도 독립소신을 당당하게 밝히며 확고한 민족의식을 나타낸 절개가 신문조서 기록에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한상길 /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들은 불과 10명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오택언스님이 있고 3.1운동으로 인해서 체포되고 실제로 징역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훗날 독립유공자로 포상 받게 됩니다.)

민족대표 33인 만해스님으로 시작해 지역 독립운동의 불꽃을 점화한 통도사 만세운동.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통도사 만세운동의 역할과 가치가 어느 때보다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BTN 뉴스 이동근입니다.

이동근 기자 btnnews@btn.co.kr

<저작권자 © BTN불교TV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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