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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후 왕실원찰 흥천사 불화 조명

기사승인 2019.10.22  07: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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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흥천사는 서울과 역사를 같이 한 왕실원찰이자 조선 후기 불교 중흥의 상징과도 같은 사찰입니다. 왕실에서 발원한 많은 불화들도 소장하고 있는데요. 19세기 이후의 흥천사 불화에 대한 학술대회가 있었습니다. 최준호 기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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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조선 최초의 왕실 원찰 흥천사가 소장하고 있는 19세기 불화들의 연구 성과를 알 수 있는 학술대회가 열렸습니다.

지난 19일 사단법인 한국미술사연구소는 국립중앙박물관 교육관에서 흥천사 성보 불화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마련했습니다.

흥천사 회주이자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 금곡스님은 오늘의 학술대회가 서울시 역사를 다시 쓰는 계기가 되기를 발원했습니다.

금곡스님 / 흥천사 회주
(아마 여기 모이신 분들은 600년 전에 다 함께 흥천사에 인연이 있던 분들의 전생이 아닌가 생각도 듭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이런 발표와 토론이 이 자리를 넘어서 우리 서울시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될 것 같습니다.)

흥천사는 태조의 첫째 왕비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을 위한 원찰로 조선 최초의 왕실 원찰이었습니다.

태종 즉위 후 신덕왕후를 후비로 강등하면서 능을 옮기고, 이후 폐사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 혁파 정책과 맞물려 불교가 중흥하면서 왕실 발원 사찰로 기능했습니다.

문명대 / 한국미술사연구소장
(이른바 고종의 즉위 후 대원군이 집정하면서 당쟁과 세도 정치의 폐해를 혁파하고자 서원을 철폐하는 등 새로운 개혁정치를 실현하면서 중단됐던 왕실의 불교 후원과 왕실 원찰이 크게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흥천사는 왕실 원찰로 복원되면서 이전의 불교문화재들을 거의 없애고 새로운 불교미술로 대체합니다.

그래서 현존하는 흥천사의 불화들은 대부분 1865년 이후 만들어진 작품들입니다.

특히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아미타 극락신앙을 표현해 왕실의 극락왕생을 염원한 흥천사 극락구품도는 조성 연대를 정확히 알고 있는 화면분할식 극락구품도 중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극락의 9품을 3품3생으로 나누어 9칸에 각각 그려 극락왕생사상을 쉽고 명료하게 도해하고 사상의 핵심인 극락왕생장면을 부각시켜 이목을 강렬하게 끌고자 했습니다.

문명대 / 한국미술사연구소장
((극락신앙을) 잘 나타내고 있는 아미타 극락구품도를 일목요연하게 9품으로 분할해 이해하기 쉽게 한 점이 가장 중요한 의의라고 생각됩니다.)

조선 후기, 혼란한 사회 상황 속에서 사람들에게 위안이 돼 주었던 극락왕생사상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극락구품도.

민간뿐 아니라 왕실의 안정을 위해서 불교가 했던 역할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BTN뉴스 최준호입니다.

최준호 기자 btnnews@btn.co.kr

<저작권자 © BTN불교TV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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