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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용사지에서 신라시대 금동보당 첫 발견

기사승인 2020.10.22  20:5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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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도 경주에 있는 황용사.

동대봉산 절골에 있는 사찰로 선덕여왕 2년인 633년에 창건됐습니다.

조계종 불교문화재연구소가 황용사지 발굴조사 결과 금동보당 당간과 기단, 금동불상 대의편, 금동사자상, 금동연봉, 금동촉대 받침 등 금동제 유물 20여 점이 다량 출토됐습니다.

발굴조사는 3년간 진행됐는데, 지난 조사에서 확인됐던 투조 금동귀면도 2점 더 확인됐습니다.

이영환 / 불교문화재 연구소 연구사
(세 점을 비교했을 때 차이는 입모양, 이빨, 그다음에 눈썹모양, 뿔 모양 이것들이 약간씩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신라시대 사찰의 깃발이나 장막을 내거는 장대로 썼던 금동보당이 국내에서 처음 발굴됐습니다.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고려시대 보당 보다 크고 제작시기도 앞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도연스님 / 황용사 주지
(금당보당은 부처님의 어떤 의식을 할 때 법당 안에서 의식 철차로써 쓰는 도구였고 이번에 2차 발굴을 하면서 국내에서는 가장 큰 최초로 학술적인 의미가 크기 때문에...)

금동불상 대의편은 직경 30㎝가 넘으며 전체 비례로 볼 때 약 1m 이상의 대형 금동불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금동사자상은 2점이 출토됐는데, 크기는 약 17㎝정도이고 앞, 뒷다리를 쭉 뻗어 무엇인가를 받치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금동연봉, 금동촉대받침 등 다양한 금동제 유물이 확인돼 창건 당시 황용사의 격이 경주지역 내 주요 사찰과 비교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높았던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황용사 당시 명칭은 황둔사였으며 '소성왕'대에 황용사로 변경돼 중창과 중수 등의 과정을 겪으면서 사세를 유지해 왔습니다.

'누를 황(黃)'자가 아닌 '임금 황(皇)'를 사용해 황실의 위상을 높이고 대제국의 건설을 이룩하기 위해 중창된 사찰로 추정됩니다.

호암스님 / 불교문화재 연구소 부소장
(황용사는 특이하게 신라, 고려, 조선까지 거쳐서 두루두루 기록적인 유물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학술적인 가치가 굉장히 높은 사찰이라 생각하고 이를 계기로 인해 한 번 더 관심을 가져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시굴 조사 결과 황용사는 계곡을 따라 다단의 석축 대지를 축조한 후 상면에 건물들을 조성했던 산지형 가람으로 통일신라시대 창건돼 조선시대까지 번창해 왔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스탠딩)
황용사지는 통일신라시대 화려한 금속공예기술과 건축기술이 집약된 유적으로 확인됐으며 추가 조사와 정비가 마무리되면 경주지역의 또 다른 불교문화 명소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BTN 뉴스 엄창현입니다.

엄창현 기자 btnnews@btn.co.kr

<저작권자 © BTN불교TV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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