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조계종 종립선원 봉암사 태고선원의 기틀을 다졌던 고우 대종사는 지난해 입적한 적명스님과 전국선원수좌회를 창립해 공동대표를 맡아 한국불교의 선풍을 진작해왔습니다. ‘제2 봉암사 결사’를 이끌고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던 태백산 선지식 고우스님이 걸어온 길을 하경목 기자가 돌아봤습니다.
------------------------------
〔리포트〕
1937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고우 대종사는 어린 시절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폐결핵으로 방황하던 25살의 고우스님은 한 생을 포기하는 심정으로 김천 수도암에서 출가했습니다.
고우 대종사는 청암사와 남장사 강원에서 고봉, 관응, 혼해 대강백에게 강원 교과를 이수하고, 29세에 당대 선지식이었던 향곡스님이 주석한 묘관음사 길상선원에서 첫 안거를 지냈습니다.
이후 제방 선원에서 정진하며 평생 참선의 길을 걸었습니다.
1968년 서옹, 서암, 지유스님을 모시고 문경 봉암사로 들어간 고우스님은 총무와 주지 소임을 맡아 한국불교의 선풍과 결사 정신을 되살려 지금의 조계종 종립선원인 봉암사 태고선원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1980년 10.27 법난으로 종단이 위기에 처했을 때 봉암사 탄성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추대하고 총무부장 소임을 맡아 종단 수습에도 앞장섰습니다.
1970년대 정진 중 불현듯 ‘무시이래’라는 뜻을 깨달은 고우스님은 보림처를 찾아 제방을 유력하다 성철스님과의 첫 만남 이후 성철스님의 백일법문과 선문정로를 통해 깨달음의 길로 가는 방법 중 화두참선이 가장 지름길임을 확신하고, 도반 적명스님과 함께 전국선원수좌회를 창립해 공동대표를 맡아 선풍 진작에 매진했습니다.
고우스님/ 2009년 중국 간화선 순례 중
(이 마음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마음은 과거, 현재, 또 공간을 다 초월하기 때문에 간화선의 의미는 현대도 없고, 미래도 없고, 과거도 없습니다. 영원합니다. )
2011년에는 간화선과 위빠사나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미얀마 파옥스님과 2박3일 문답 대화를 나누며 불교수행법에 우열이 없음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고우스님/2011년 간화선과 위빠사나 국제연찬회 중
(초기불교는 서쪽에서 오르는 것이라면 대승불교는 동쪽에서 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쪽에서 오르는 이 길은 좀 평탄하면서 길이 좀 길어요. 그런데 동쪽에서 오르는 대승불교는 길은 짧은 대신에 굉장히 경사가 졌습니다. )
2007년 조계종 원로의원에 추대되고, 종단 최고 법계인 대종사 법계를 품수한 고우 대종사는 노년에도 빨래를 손수하며 소욕지족의 삶을 몸소 보이며, 불교가 세상에 기여하려면 정견을 갖추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고우스님/2013년 BTN무상사 일요초청법회 중
(우리가 생활에서 소통이 안되면서 자기를 굉장히 괴롭히는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소통은 그렇습니다. 저도 그동안 경험을 해봤지만, 서로 서로 인정을 해야합니다.)
누가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간다’고 말하라던 고우 대종사.
영원한 행복의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하얀 눈썹의 선지식은 태백산으로 돌아갔습니다.
BTN뉴스 하경목입니다.
하경목 기자 btnnews@bt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