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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사·천진암 기획 1, 2] 해운대사비 절두산, 추암당대사 부도는 여주군으로‥

기사승인 2021.11.24  07: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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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천주교의 순교성지인 서울 절두산에 순교자 묘비와 함께 스님의 부도비가 있습니다. 주어사에서 옮겨 온 건데, 천주교 측은 스님의 부도비가 종교간 평화에 기여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과연 그럴까요. 주어사, 천진암 기획보도 오늘부터 네차례 연속으로 보도합니다. 먼저 하경목 기자와 최준호 기자가 이어서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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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스탠딩> 머리를 자른다는 뜻을 가진 절두산입니다.

조선 후기까지 양화진 잠두봉이었지만,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인들의 처형장이 되면서 절두산이라고 불리게 됐습니다.

1966년 한국 천주교가 순교성지로 지정하면서 순교자 기념탑과 성당이 들어서고 천주교인들의 순례 코스가 됐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스님의 부도탑이 있습니다. 

높이 91cm 폭 33cm의 해운당대사 의징지비, 비명이 선명합니다.

탑의 뒷면에는 “숭정 기원 후 무인년 5월 어느 날 세우다. 상좌 수견ㆍ천심”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탑비는 1973년 11월 경기도 여주 주어사에서 발견된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겁니다.

해운대사의 부도탑비가 왜 가톨릭의 순교성지에 와있는지 관계자에게 물어봤습니다.

절두산 관계자(전화인터뷰)
(저희는 그것에 대해서 이미 답변을 드린바가 있어요. 그런데 이걸로 계속 연락이 오는 이유를 잘 모르겠는데요. /어디에다 답변을 하신 거죠?/저희는 조계종에다가 교구에서 회신을 드린 것으로 알고 있어요. 2017년에 이미.)

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에 확인한 결과, 2017년 5월 서울대교구는 ‘해당 비석은 부정한 방법이 아닌 정상경로를 통해 취득한 것이므로 환수 요청 대상 유물이 아니’라는 답변을 보냈습니다. 

서울대교구가 밝힌 ‘정상경로’는 무엇일까.

서울대교구 관계자(전화인터뷰)
(어떤 경로를 말씀하시는 건지 궁금해서요? / 추가로 뭔가 확인할 부분이 필요하시다면 요청하시는 문서를 보내주시면 됩니다.)

1999년 절두산 순교성지가 발행한 <한국 가톨릭 문화유산과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따르면, 해운당대사 탑비는 가톨릭 관계자들이 1973년 주어사 터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으로 논 주인 이 씨의 기증 승낙을 얻어 양화진성당 뜰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논 주인 이 씨의 승낙이 정상 경로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김봉석 변호사(전화인터뷰)
(소유권자가 있으면 소유권자의 동의를 얻어야 되는 것이고, 만약 소유권자 여부를 알 수 없다면 유실물법에 의한 유실물 습득절차를 거쳐서 가져가야 정상적인 방식입니다. 그래서 우리 문화재가 다 국가 소유가 된 것 아닙니까. 절 땅에서 발굴한 것도 내가 못 갖는 세상인데. )

조선시대 유생들이 천주학을 강학한 곳인 주어사가 한국 가톨릭의 요람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면서, 천주교측은 해당 비석이 오히려 종교간 평화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법적인 다툼을 차치하고라도 도덕적인 측면에서도 유물은 제자리에 있을 때 역사적인 빛을 발한다는 것이 해외 문화재환수에서도 주된 논리로 여러 차례 언급되는 내용입니다.

<하경목 스탠딩> 탑비의 주인공이 스님이라는 것만으로도 탑비는 불교계, 혹은 주어사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 진정한 종교 평화에 기여하는 일이 아닌지 고민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스탠딩> 주어사지에서 발견된 것은 해운당대사 탑비만이 아닙니다. 

1997년 추암당대사 정여승탑이 발견돼 여주시 향토사료관에 전시됐다가 현재 여주박물관 야외공간에 옮겨져 있습니다.

1699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종형의 추암당대사 정여승탑은 주어사지에서 70미터 아래 계곡부에 방치돼 있던 것을 등산객이 발견해 신고하고, 당시 여주군 문화공보실에서 수습했습니다.

구본만 / 여주시청 문화재팀장(전화인터뷰) 
(주어사 올라가는 입구 부근에 해운당대사 의징지비와 부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해운당대사 의징지비는 천주교 측에서 절두산 성지로 옮겨갔고, 부도는 여주군에서 지금의 여주박물관 전신인 향토사료관에서 가져가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천진암과 함께 최초의 한국 천주교 강학지로 알려진 주어사는 다산 정약용이 직접 쓴 정약전과 권철신의 묘지명의 일부분인 ‘주어사에서 강학을 했다’는 기록에서 나타납니다.

주어사와 관련된 전설로 한 스님이 잉어가 머무는 곳에 절을 지었으나 어느 날 빈대가 법당 한가운데 기둥을 이룰 정도로 들끓어 수행자들이 ‘계시’로 생각해 절을 떠나 폐사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어사 관련 활동을 해오고 있는 송탁스님은 이 전설이 원래 전해 내려오던 것이 아니라 나중에 만들어진 이야기로 생각된다고 밝혔습니다.

송탁스님 / 아리담문화원장
(우린 ‘계시’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아요. 부처님의 계시라는 말은 쓰지 않거든요. 그런데 ‘계시’라는 단어를 듣고 이건 좀 만들어진 얘기가 아닐까. 부처님의 계시로 스님이 이 절은 명이 다됐으니 떠나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스님들의 정서상 이게 맞는 말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천진암은 <여지도서>나 <해동지도> 등 지리서에도 그 이름이 등장합니다.

천주교 수원교구는 1779년 강학이 열릴 당시 천진암이 이미 폐사돼 성역화가 불교계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증거로 다산이 1827년 폐허가 된 천진암 터를 방문해 지은 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인 샤를르 달레 신부의 <조선천주교회사>에는 강학을 처음 시작하던 시기 광암 이벽이 스님들의 안내로 눈길을 뚫고 강학 장소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1797년 다산이 형제들과 천진암에 놀러가 쓴 시 ‘사석’에서는 천진암 스님들과 함께 공양하고 잠에 들었다고 명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후 30년 뒤 귀양을 갔다 온 다산이 다시 천진암을 방문해 지은 시가 천주교 측에서 제시하는 1827년의 시인 겁니다.

그래서 1827년의 시는 오히려 천진암이 1801년 신유박해로 스님들이 희생되고 절도 불태워졌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주어사와 천진암의 역사와 폐사 경위 등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나오지 않고 있는 가운데 구전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천주교 측의 일방적인 성지화 추진과 불교 지우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두 사찰의 역사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BTN 뉴스 최준호입니다.

하경목, 최준호 기자 btnnews@btn.co.kr

<저작권자 © BTN불교TV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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